강경남 할머니

강경남 할머니

우토로마을에 가면 찾아오는 이들 누구라도 반겨주셨던 강경남 할머니. 우리는 할머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강경남 할머니의 생애사를 통해서 비단 할머니뿐만 아니라 우토로 주민 1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95세 생일을 지낸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생을 마감하신 강경남 할머니. 할머니의 일대기를 통해 당시 재일동포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함께 생각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강경남 할머니 사진

강경남(姜景南)(1925~2020)

1925년 경상남도 사천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아버지와 어미니, 언니 둘과 오빠가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이 그러했듯 아버지는 일하러 먼저 일본으로 가셨고, 언니 둘과 오빠도 일본으로 가버려 고향에는 어머 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34년 먼저 일본으로 가신 아버지가 조선에 다녀오려는 사람에게 부탁 하여 어머니와 강경남 할머니는 오사카로 오게 됩니다. 이때 나이 8살, 일본에 와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사카 스미요시 신사 근처에 집이 있었고, 집 뒤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강이 있었습니다. 오사카 스미요시에서 살다 사카이시로 옮겼습니다. 야마토강의 다리를 경계로 오사카와 사카이로 나뉘는 곳에 살면서 학교에 갈 나이지만, 이런 저런 일을 했습니다. 학교에 나가질 못하니 당연히 일본말하기는 어려웠고, 더디게 일본말을 익히게 되었지요. 과자만드는 곳, 전기구를 만드는 곳 등에서 일하였는데, 제법 큰 회사에서 일할 때는 실무자가 경찰이 오게 되면 일하는 데 옆에 가서 앉아 구경하고 있으라 했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일할 수 있는 나이면 그런 말 안하는데 일할 나이가 안됐으니까 거기 사람이 그렇게 말해준거지. 학교 안 갔지, 어리지 하니까. 만약 경찰이 오면 그냥 서 있는 거라고 하라고 말해줬어. 거기서 일하다가 시집온 거야.”

우리나라 나이로 18살에 결혼하여 다시 오사카로 왔습니다. 얼굴도 모른 채 부모가 시켜 하게 된 결혼이었습니다. 그때는 다들 그랬으니까요. 오사카에서 시어머니와 남편과 새로운 생활이 시작됨과 동시에 일본과 미국과의 전쟁도 시작되었습니다. 오사카는 전쟁의 공포가 연일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미군의 비행기 공습에는 큰 사이렌이 울리고, 헬기 등 날아가면 작은 사이렌이 울리며 공습경보를 알렸습니다.

“그 때는 이렇게 흰옷 입으면 안 돼. 전부 검은 옷을 입고 있어, 어딘가 가 있어서 사이렌이 큰 것이 울리든 작은 것이 울리든, 벽에 달라붙어서 움직이면 안 된다. 움직이면 (폭탄이) 떨어지니까.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인근 일본인이 하는 말, “교토는 비행기도 안뜨고 폭탄도 안떨어진다”고 하고, 시어머니도 여기(오사카)에 있다간 다 죽겠다며 오사카를 떠갈 궁리를 하 고 있던 터에 우토로에 오게 됩니다.

“남편은 오사카 집에서 나막신의 끈을 꿰는 일을 했는데 징용을 피할 수 있다면서 오사카 항구에서 배 만드는 일을 시작했지만 공습이 있을 것이라고 즉시 우토로의 비행장 만드는 일로 옮겼어요. 1944년 쯤이지요”

비행장 건설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종전과 함께 일자리도 없어졌습니다.

“참 열심히 일했다. 그때(광복 이후)는 남성도 일이 그렇게 없었다. 산에 가서 일본 전쟁 때 버려진 함석판 같은 것, 그런 것 주워 팔아서 집도 짓고, 밥도 묵고 했다.”

삼나무 얇은 판자와 시멘트로 만든 집에 다다미 6장과 3장짜리 방 두칸에서 아이들 다섯을 키웠습니다. 우토로마을이 있는 우지시는 녹차로도 유명하지요. 강경남 할머니도 녹차잎 따기 일도 다니며 아이들을 돌봤습니다. 큰애는 학교에도 못 가고 동생들을 돌봤고, 그 사이 녹차잎 따는 일을 다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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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밭에서 일하는 동료들(맨 앞은 일본인. 할머니는 뒤쪽에)

먹고 살기 힘들고, 일자리가 없으니 생계대책을 호소하고 농성을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족학교 폐쇄 조치 등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이어서 일까요? 1952년 3월 13일 440명의 경찰이 4시간에 걸쳐 마을을 수색했습니다. 범죄 용의자가 마을에 숨었다는 이유였습니다. 경찰은 무슨 근거로 우토로마을에 범죄자가 있을 거라 추측했을까요? 재일동포들이 집단으로 거 주하는 마을을 왜 혐오의 시선으로 보게끔 조장하는 것일까요? 강경남 할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흙 뭍은 발 그대로 집안에 강제로 들어와 천정 속까지 들여다보고 아이들이 자고 있는데 이불을 뒤집어 버리고 화장실에도 보내주지 않았어요. 물론 일하러 갈 수가 없어요. 베어 논 벼를 말리는데 사용하는 장대가 있었는데 그것을 발견하고는 ‘죽창이 나왔다’고 마을에 방송했어요. 마이크인가 뭔가 하는 것으로. 반항하며 대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체포된 사람도 있었어요.”

“아무런 나쁜 일도 하지 않았는데 그 일은 분했어요. 지금도 생각만 해도 분합니다. 당시는 젊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는데 지금이라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이런 식으로 경찰은 나아가 일본사회는 우토로마을을 고립시켰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난하고 고된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집은 낮제, 비가 좀 내리면 다다미 위에까지 (물이) 올라온다. 물 내리가는 데가 없었다. 비가 오면 이불도 젖지, 다다미도 다 젖고, 화장실도 넘치고 난리가 났다. 일하러 갔다오면 다 젖은 다다미 위에 아이들이 눠자고 있어서 건강 해칠까봐 걱정도 많이 했다. 그래서 시에 가 서 물 내려가는 데를 만들어 달라고 얼마나 댕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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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왼쪽)와 마을 주민(뒤에는 돼지우리)

그래도 마음만은 편한 곳이었습니다.

“50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았지만 집이 여기저기 세워진 정도로 거의 변하지 않았어요. 모두 잘 아는 같은 이웃이라서 문을 열어놓고 나가도 안심이 되고 빨래 같은 것도 비가 오면 걷어 서 집안에 넣어주지요. 정말이지 좋은 마을이야”

고령이 되어도 잡초 뽑기나 토목 작업의 현장에서 일해만 했습니다. 70년대가 돼서야 2층짜리 작은 집을 마련했습니다. 우토로주민들에게 집은 자신의 삶을 모두 바친 분신과도 같은 것이 었습니다. 타향에서의 고된 삶을 쉬게 해주는 집이야 말로 이들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안식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집에서 나가라고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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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집

“옛날 조선 탁배기(막걸리) 만들어 팔았지. 그거 마음대로 만들어 판다는 걸 경찰이 알면 잡아 가지. 잡혀가지. 적어도 아무도 말하지 않았어. 그걸 하고 있어도. 한 되 사서, 신문지에 싸서, 이렇게 가져가는 것도 보고. 그렇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 같은 인간인데. 그런데 그 막걸리를 팔아 그 돈으로 아들을 동경 공부시켰는데, 그 다음에 돌아와서, 그 녀석이 이 땅을 사고, 팔아먹은 거야.”

우토로마을 일부에 상수도가 들어오자 닛산차체는 땅을 우토로 출신 개인에 팔아버립니다. 그리고 이 개인은 부동산 법인인 서일본식산에 되팔아 버리죠. 이때부터 마을에는 철거업자,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빈번하게 출몰하며 마을을 불안하게 만들기 시작합니다.

“우리집 앞에서 이렇게(트럭 앞에) 누운 거야. 트럭 운전사가 깜짝 놀랬어, 내려와서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너 말이야 여기 집 부수러 온 거면 나 먼저 죽이고 부수라. 여기서 평생을 일한 사람이 살라고 하는 건데, 왜 집을 부수러 오는 거야. 그렇게 말했더니 트럭이 후진해서 돌아가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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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동포들

우토로를 지키기 위해 주민들은 물론 동포들과 일본시민들도 합세하여 온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오사카, 교토는 물론, 나고야, 와카야마 등 각지를 돌며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고 주거권을 지킬 수 있도록 호소하였습니다. 주민들의 절박한 목소리에 많은 시민들이 응답을 하였고, 이윽고 한국의 국회의원들과 대통령까지도 이 소식을 듣고 문제해결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일의 시민들, 재일동포들의 응원과 한국정부의 지원, 일본정부의 공적 주택 건 립으로 우토로주민들은 마을이 있던 그 자리에 시영 아파트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여기 사는 사람들이 이겼어. 모두가 응원해주었기 때문이야. 기뻤어. 모두 응원해줘서, 그렇지?”

그렇게 우토로에 살아온지 70여년이 되었을 즈음 새로운 만남은 할머니를 일약 스타!?로 만들 었습니다. 2015년 MBC문화방송의 “무한도전”팀이 촬영을 온 것입니다. 작별인사를 하는 유재석, 하하에게 “우리나라로 돌아갈 때 조심히 가거라”하시며 “나쁜 짓 하면 안 된다. 남의 것 훔쳐 먹고 나쁜 소리하고 그러면 안 된다”는 말씀을 남기시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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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무한도전 방문

방송이후 마을은 많은 분들이 찾아왔습니다. 1년에 천여명이 방문할 정도로 많아졌는데요. 마을회관 에루화가 시끌벅적하다 싶으면 어디선가 보행보조차를 끌고 할머니가 나타나셨습니다. 반가워하는 방문객들과 사진도 찍고, 팔도강산, 밀양아리랑 등 우리 전통 타령과 노래를 흥얼거리며 처음 보는 사이의 어색함을 날려버리고 이내 우리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 가끔식 보이시던 눈물.

“정말 사람이 많이 왔거든. 수십명이 올 때도 있고, 도쿄에서도 왔고, 나고야에서도 왔고, 홋카이도에서도 왔었잖아. 여러 나라에서 돈을 써오면 정말 기뻐서 눈물도 나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커피 한 잔도 사주고 싶은데, 한 명 두 명 정도 하면 사줄 수 있지만, 수십 명 오니까...안쓰러워 죽겠어요. 비행기 타고 오면 그게 안쓰러워 눈물이 나.”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우토로마을을 찾아와 준 이들에게 차한잔도 대접 못하는 안쓰러운 마 음에 눈물도 보이시곤 했던 할머니였습니다. 마을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2018년 새 아파트에 40가구가 입주하였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랜만에 야끼니꾸집회(숯불 불고기 모임)를 열었습니다. 그렇지만 점차 변하는 마을과 점점 사라지는 이웃들을 생각하면 쓸쓸합니다. 아들이 사는 새아파트도 며칠 지내다 원래 집으로 다시 왔습니다. 비오면 침수 당할 걱정은 없겠지만, 왠지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마을을 다니다 문이 열려있음 인사하고 차한잔 마시던 골목길의 정겨움이 굳게 닫혀 있는 아파트 문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요? 우토로에 살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은 무엇인가요?

“친구들과 모여서 놀았던 것이 가장 즐겁다. 옛날, 몇 년 전의 우토로가 좋아. 1년 정도 전이 네? 다 없어졌어. 재밌어. 얼굴 맞대고 이야기도 하고 1년에 몇번 온 가족이 모여서 고기하며 구워서 먹고 장고 두딩기고 춤추고 놀거나 그런 일이 있었네. 지금은 사람이 없어.”

앞으로 이 우토로가 어떻게 됐으면 좋겠어요? 어떤 우토로였으면 좋겠어요?

“어떤 우토로라도, 우토로에 살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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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에서 죽으리라

‘우토로에서 살아왔고 우토로에서 죽으리라’ 2020년 11월 21일 저녁, 95세 생신을 지낸지 불과 며칠 뒤 할머니는 그 말씀대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강경남 할머니는 마을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어색함을 무장해제시 키고 마을과의 교류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할머니의 별세소식에 한국에서 수십여건의 개인과 단체가 조의와 헌화의 뜻을 모았고, 문재인대통령의 조의를 전하기 위하여 오사카 총영사관이 직접 빈소를 방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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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소 모습

고향이 식민지가 되어, 그리고 제 2의 고향인 우토로의 땅이 팔리며 그야말로 발 딛고 설 땅을 두 번이나 잃어버렸던 우토로의 1세들. 하지만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한복을 입고, 장구와 꽹과리를 앞세우며 재일동포의 차별임을 알리고, 우토로에서 살아갈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였습니다.
우토로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분이 강경남 할머니 한분이 아니듯이 우리가 강경남 할머니를 기억하려는 것은 재일동포들이 겪었던 아픈 역사와 이에 당당히 맞서고 연대를 통해 함께 극복한 노력들이 지금 우리에게도 이어져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함께 하는 기억은 역사가 됩니다. 강경남 할머니와 재일동포 1세들을 기억하며 이들의 역사가 잘 계승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